낚시문화의 시대별 여건변화와 여가적 특성에 관한 고찰
Abstract
This study has examined the changes of fishing culture in Korea by employing a period division as follows: formative period(prior to 1960), setting period(1961-1979), transition period(1980-1989), the co-existence period of diverse fishing forms(1990-1999). and the period of an amalgamation between fishing and tourism(2000-present). As a result, this research found that the Korean fishing culture was characterized by a male-dominating and time-consuming leisure activity. Along with these, there was another characteristic in fishing in Korea which was a leisure sport highly susceptible to environment pollution problem throughout all periods. It seems likely that these combined factors provided the underlying cause of why Korean fishing did not create a new paradigm. In view of this, the fusion of fishing and tourism which began to invigorate from the decade of 2000 is important. It is high time for Korean fishing to transform itself into a family and experience-oriented leisure activity for the purpose of expanding the base through the close ties to tourism.
Keywords:
angling industry, angling culture, angling club, leisure culture키워드:
낚시산업, 낚시문화, 낚시회, 여가문화Ⅰ. 서론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현대사회는 대중을 위한 여가문화시대이다(Kim & Chang, 2004). Son(2016)은 탈산업사회가 되면서 노동시간 단축과 일과 삶의 균형이 여가인식을 바꾸고 여가문화를 바꾼다고 하였다. 그리고 Kim and Chang(2004)은 경제개발 정책 이후 대중의 여가활동은 적극적이 되었고, 늘어난 여가시간에 어떤 활동을 할 것인가는 삶의 양식이 되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이렇듯 여가가 대중화되기까지는 시대적 흐름과 더불어 정착하고 발전하게 된다. 같은 맥락에서 어떤 특정 여가가 갖게 되는 특성은 여가 자체뿐만 아니라 사회적 변화에 따라 바뀔 수밖에 없다. 결국 여가적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 시대별 사회변화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한 기초연구이다.
그 중 낚시는 대표적인 아웃도어 레크리에이션으로 장소, 자연환경, 전문화, 장비 등에 따라 매우 다채로운 행태를 보이는 활동으로 산업적 규모가 크다. 그리고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 진입에 따른 여가비용지출의 증가와 여가산업의 발전기회가 예상되고, 향후 여가시장 키워드 전망에서 대자연(mother nature)과 해양(marine)이 포함되고 있다는 점 등은 여가로서의 낚시 연구가 필요한 시점임을 말한다(Korea Chamber of Commerce and Industry, 2012). 또한 1996년 해양수산부가 독립부처로 설립되면서 해양문화와 해양정책의 사회적 공감대를 이끌어냈으며, 정부육성정책 중 해양레저산업육성정책에 따라 그간 다양한 국제 이벤트 개최와 마리나 사업, 해양관광, 어촌관광에 대한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어 낚시의 역할도 부각되고 있는 시점이다(Ok, 2011). 이러한 흐름에서 2012년 9월 「낚시관리 및 육성법」이 새롭게 제정되었으며, 이 법은 수자원 보호를 위한 낚시행위 제한에 관한 관리법적 측면과 쾌적한 낚시 환경, 낚시인 권익보호, 건전한 여가활동을 통한 국민 삶의 질 개선을 위한 산업법적 측면 모두를 담고 있어 여가적으로도 의미가 크다.
그간 낚시를 여가적 측면에서 다룬 국내 연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Hong(2012)의 낚시인구조사에 따르면 전체 낚시인구는 약 570만 명이며, 바다낚시 193만 명(34%), 민물낚시 380만 명(66%) 등으로 집계되었다. 이 중 남성이 440만 명으로 76%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연 5-6회 이하로 참여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또한 바다 여가활동을 포함하고 있는 해양관광에 대한 참여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며, 바다낚시공원의 필요성이 제시되고 있다(Lee, 2008). 이외에 낚시면허제와 같은 낚시관련법 및 제도(Kin, 2010; Lee, 2012), 국제낚시박람회(Hart, 2011), 해양낚시 마케팅 전략(Kang & Kim, 2009), 레크리에이션 전문화와 장소애착(Lyu & Oh, 2008), 낚시터 혼잡지각(Hong, 2007) 등에 관한 연구가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 낚시에 관한 선행연구에 의하면 앞으로 낚시 인구는 꾸준히 증가할 것이며, 이에 준하는 법제를 기반으로 낚시와 관련된 다양한 체험 행태가 요구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렇게 낚시가 여가 산업적⋅정책적⋅법적으로 중요하게 된 시점에서, 낚시는 과연 어떤 사회적 변화에 반응했고 어떤 여가적 특성을 가지게 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은 낚시 연구의 기초자료로써 매우 의미가 있다. 구체적으로 지금까지의 낚시문화는 어떠하였는가? 낚시변화에 영향을 준 시대별 환경변화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변화에 따른 낚시의 여가적 의미는 무엇인가? 등에 관해 의문이 생긴다. 이러한 질문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특정 사회현상을 분석하는 연구에서는 역사, 현재 그리고 성격변화에 대해 논의하는 분석틀을 사용하기도 한다(Kim, 2009). 이는 상황배경과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하여 확인된 역사적 사실들을 하나의 관점에서 탐색하고 고찰하는 방식이다. 이를 낚시의 여가문화 연구에 접목하자면, 한국사회 변화의 단면을 통해 여가활동으로서의 낚시가 가진 의미를 살펴보는 것으로, 지금까지의 낚시문화 성격과 위치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낚시의 사회문화적 측면에 관심을 가진 선행연구는 한국 민물낚시의 변천과정을 고찰한 Choi(2009)의 논문이나 한국 고유의 낚시 장르인 견지낚시의 스포츠적 특성과 개략적 역사를 탐색한 Bae and Lee(2008)의 논문 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Choi(2009) 연구에서는 낚시변천과정을 한국의 고대와 중세, 구한말-6.25, 1960-1980년대, 1990-2000년대로 구분하여 기술하였으며, 민물낚시의 문제점을 환경오염 문제와 ‘관리되는 낚시’ 행태의 변화로 보았다. 이 점이 앞으로의 낚시문화 변화에 중요한 결정요소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낚시인들이 가져야 할 환경에 대한 인식과 지속적인 낚시환경에 대한 견해에 대해 통찰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단, 최근 주목되고 있는 해양레저와 바다낚시에 대한 부분과 여가현상으로서 낚시의 특징에 대한 분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본 연구는 위와 같은 낚시문화를 둘러싼 선행연구의 시사점과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한국낚시문화가 어떻게 흘러왔으며, 현재 낚시문화의 여가적 특성은 어떠한지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따라서 본 연구의 목적은 낚시문화의 여건변화를 시대별로 살펴보고, 그에 따른 여가적 의미를 도출해보는데 있다.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낚시문화에 대한 향후 과제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문헌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였다. 우선 전반적인 시대별 여건들은 한국현대사를 1940년대부터 2000년대 까지 정리한 자료를 주로 활용하였으며(Kang, 2006; 2011), 체육사를 광복 이후부터 정리한 한국현대체육사(Lee, 2008)를 토대로 여가스포츠에 영향을 미친 중요변화들을 추출하였다. 그리고 2007 여가백서(Korean Culture and tourism Institute, 2007)를 참고하여 시대별 여가문화 흐름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한국 낚시문화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주로 일간지(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매일경제신문, 서울신문, 한겨레 등)와 비교적 낚시 문화와 현상에 관한 심층적인 기사를 다뤘던 낚시잡지인 「낚시춘추」, 「월간낚시」를 통한 여가적 특성의 고찰이 이루어졌다. 본 연구에 활용한 일간지와 전문잡지는 시대별로 접근이 가능한 매체와 열람 방식에 차이가 있다. 우선 동아일보, 경향신문, 한겨레, 매일경제신문, 서울신문 등은 네이버뉴스 라이브러리와 한국언론재단이 구축한 DB인 KINDS에서 검색과 자료출력이 이루어졌으며 분석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네이버뉴스 라이브러리와 KINDS에 포함되지 않은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당사 홈페이지 아카이브에서 다운받은 PDF를 출력하여 활용하였다. 그리고 온라인으로 제공되지 않는 기간 중 주요 기간인 일제강점기 보도 자료나 온라인 서비스가 이루어지지지 않는 전문 잡지의 경우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그리고 낚시춘추에 이르기까지 국립도서관 신문자료실에서 열람 가능한 마이크로필름과 출판원본을 직접 검색하고 출력하여 자료 분석에 활용하였다.
이와 같은 절차를 거쳐 전반적인 시대적 여건 변화와 낚시문화 변화에 관한 주제를 선정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핵심적인 낚시의 여가적 특성을 도출하였다. 그리고 낚시의 여가적 특성들을 가장 잘 표현해준 기사를 중심으로 본문에 제시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첫째, 1960년대 이전부터 현재까지 5단계로 시대별 여건변화단계를 나누었다. 둘째, 각 연대별로 나타난 주요 정치사회적인 시대배경과 낚시문화의 여건변화를 조명하였다. 마지막으로 낚시문화 여건변화가 여가적으로 어떤 특성을 보이고 있는지 핵심 이슈가 무엇인지 제시하였다.
Ⅱ. 낚시문화의 시대별 여건변화
2007여가백서의 여가생활 연대표에 따르면(Korean Culture and Tourism Institute, 2007), 1960년대를 기점으로 여가의 개념이 발생하였으며, 1970년대 관광자원개발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 개입이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1980년대는 다양한 여가생활이 나타나게 되고, 1990년대는 이렇게 다양해진 여가생활과 관련된 정부역할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는 시점이라고 하였다. 2000년대는 지역균형 발전 및 여가시간활용과 관리가 중요한 여가관련정책임과 동시에 국민여가생활 수요변화로 꼽았다. 이러한 여가의 변천과정의 틀에서 낚시문화도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그 흐름을 같이 하고 있다. 시대배경과 낚시여건변화에 준하여 낚시문화를 형성기-정착기-전환기-공존기-과도기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1. 낚시문화 형성기(1960년대 이전)
한국에서 근대 스포츠가 학교, YMCA, 청년단체 등을 통해 보급, 확산되던 일제 강점기에는 근대화의 영향으로 주말에 도시를 탈출해 기차를 타고 낚시를 즐기는 근대적 의미의 낚시인들이 등장하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각 지역에서는 신문사의 후원을 받아 낚시 대회가 개최되기도 했으며 비교적 규모가 큰 저수지에서는 많은 인파의 낚시인들이 몰리는 현상까지 생겨났다. 당시 신문 보도에 따르면 일제 시기 낚시 인구는 경성을 중심으로 대략 2만 명으로 추정됐으며, 겨울을 제외하고 낚싯대를 들고 있는 낚시인들의 모습을 특히 시흥역과 수색역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Donga Ilbo, 1938. 11. 10). 이 시기에는 각 지역에서 낚시 대회도 간헐적으로 개최됐다. 황해도 해주군에서는 1936년 동아일보 청단지국 후원아래 어부대회를 전국적으로 유명한 구암저수지에서 개최했는데, 참가자가 모두 농민이 될 것으로 예상해 상품을 모두 농기구로 선택했으며 참가금은 1인당 1원으로 정했다(Donga Ilbo, 1936. 6. 21). 1936년 울산군 동면 방어진항 근처의 등대산 해안에서는 70명의 낚시 동호인이 성황을 이룬 바다낚시대회도 열렸는데 이 대회는 동아일보 방어진 분국의 연중행사 중 하나였다(Donga Ilbo, 1936. 5. 15).
Choi(2005)는 지금의 여가활동은 근대사회의 산물이며, 근대사회의 조건에서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근대성 하에서 여가가 형성되고 변동되고 사회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일제강점기에 근대적 대중여가로 등장한 낚시가 전통사회에서 먹고 살기 위한 일의 행위가 아니라 여가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은 전통사회와의 단절과 새로운 도시문명의 등장이라는 의미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Kim, 1993).
해방이후 이승만 정권시절에 나타난 한국 낚시의 주요 특징은 주로 정치인, 고급 공무원 등이 낚시를 즐기며 낚시 문화를 주도했다는 점과 함께 주요일간지들과 유력 낚시회가 손을 잡고 전국 규모의 낚시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낚시의 정치화는 기본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낚시 애호가였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비원, 광나루 강변, 진해 연안 등에서 낚시를 즐겼으며, 특히 그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워커힐 근처에 있는 별장에 머물며 호화 유람선을 띄우고 프란체스카 여사, 양아들 이강석, 자유당의 2인자였던 이기붕과 남양주군 구리읍 토평리의 토막나루 부근에서 낚시를 하곤 했다(Donga Ilbo, 1960. 2. 14; Kyunghyang Shinmun, 1983. 8. 31). 이승만 대통령은 본인 명의 상패와 상장을 각각 1956년 한국일보와 1957년 서울신문이 주최한 전국낚시대회에 하사할 정도로 낚시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Naksi Chunchoo, 2001. 3. Special Supplement, 126-127).
이 시기 정치인 가운데 낚시와 관련해 가장 주목할 만한 인사는 자유당 국회부의장을 지낸 이재학이다. 이재학은 1957년 발족된 전국낚시연합회의 초대회장으로 그가 다녀간 낚시터는 ‘이재학 낚시터’로 불리며 상당히 오랜 기간 낚시인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됐다. 이재학이 주로 다녔던 낚시터에는 ‘고기’가 아니라 ‘감투’를 낚으려는 인사들이 많았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컸다(Donga Ilbo, 1957. 10. 24; 1962. 5. 30). 또한 당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서울낚시회와 태공회는 각각 자유당 정치인이자 고급관리인 최인규와 인태식이 회장을 맡고 있었으며, 낚시 모임자체가 정치화되었다는 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Kyunghyang Shinmun, 1958. 5. 29).
정, 관계의 유력인사들의 주도로 형성된 초기 한국 낚시문화는 점차 주변으로 확산되면서 비록 추청 치 이기는 하지만 서울 시내 낚시회 회원들이 6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Donga Ilbo, 1958. 9. 18). 하지만 이 시기 낚시의 발전은 단순히 낚시인구의 증가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전쟁 이전까지 낚시인들은 기차나 버스를 타고 역에 내려 10~20리를 걸어서 낚시터로 가야 했지만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대절 버스를 타고 직접 낚시터에 내리는 문화가 도입되기 시작했으며,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끼리 낚시회라는 친목단체를 만들어 단체 낚시를 즐기게 됐다. 1958년 서울 시내 낚시회는 10여개 정도 존재했으며, 회장으로 고급관리를 모시는 경향을 보였다(Chosun Ilbo, 1958. 7. 16).
이렇듯 낚시문화 형성기라고 볼 수 있는 1960년 이전은 근대적 낚시가 등장했고 정치인과 유력인사들이 즐기기 시작하면서 낚시의 정치화가 이루어졌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에 Choi(2009)은 이 시기의 낚시를 고급 스포츠 골프와 비교하여 정치 고위직 인사들과 명사들의 인기 여가였음을 지적하였는데, 이는 당시 낚시가 여가로서 계층 간 구별짓기가 가능할 정도로 상류층 이미지였으며, 낚시의 위상이 높았다는 것을 의미한다(Choi, 2005).
2. 낚시문화 정착기(1961-1979)
‘이촌향도(離村向都)’ 현상과 정부주도형 경제개발로 대표되는 1960-70년대는 농경사회에 머물러 있던 한국 사회에 새 전환점을 제시한 시기였다. 여가가 발전할 수 있는 토대인 도시화와 산업화가 가속화된 것도 이 시기였다. 실질소득의 증가, 교통과 매스 미디어의 발달은 특히 단조롭고 비활동적인 업무를 하던 도시 중산층들에게 여가를 향유하고자 하는 욕구를 상승시키기에 충분했다. 한국사회에서 낚시가 주요한 여가 스포츠의 한 형태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것도 1960년대 부터였다. 이 시기에는 여가를 즐기고자 하는 대중, 특히 도시민들의 욕구가 높아진 상황에 편승한 낚시를 비롯한 여가 스포츠의 상업화가 시작됐다. 경제성장 속에 싹튼 레저 붐은 60년대 중반부터 시작, 신문사 관광업체가 다투어 벌인 단체관광, 스키, 수영 등 각종 강습회, 등산, 낚시, 경마, 골프, 자전거, 오토바이, 하이킹 등 레저를 즐기는 도시민의 수는 늘어갔다는 보도에서도 잘 나타난다(Kyunghyang Shinmun, 1969. 12. 15).
한국 낚시의 대중화와 상업화는 수많은 낚시회들이 출현하면서 본격화됐다. 이 시기에 왕성한 활동을 했던 낚시회는 대체로 상류층 인사들이 대거 포함된 고급사교 모임의 성격을 갖고 있거나 은행·관공서 등에서 직장 동호회 형식으로 만들어진 경우, 또는 특정 지역의 낚시 용품점을 중심으로 생겨난 3가지 경우로 나뉠 수 있다. 우선 고급사교 모임에 가까웠던 서울 낚시회의 회원들은 주로 의사, 정치인, 은행원, 교육자, 예비역 장성 등 상류층 인사들이 주축을 이뤘으며 이들의 부인들도 참가했다(Chosun Ilbo, 1966. 5. 31). 서울 낚시회의 회원 구성이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이 당시 전통 있는 낚시회의 회원들은 비교적 생활에 여유가 있는 중산층 이상의 전문직 종사자들이 많았다. 이는 용품 구입, 낚시회 회원비 등 경제적 능력이 뒷받침 돼야 낚시회에서 낚시를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연과 호흡하며 인내가 필요한 낚시에 도시에 거주하는 ‘정신 노동자’들이 먼저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Chosun Ilbo, 1963. 5. 5). 이런 현상은 19세기 근대화된 낚시 문화가 발전되던 영국에서도 나타났다. 당시 도시의 스트레스를 벗어나기 위해 고급취미로 낚시를 즐겼던 사람들은 판사, 변호사, 교수, 의사들이었다(Holt, 1989).
두 번째 낚시회 형태로 직장이나 관공서를 모태로 생겨난 낚시회는 사원들의 친목도모를 목적으로 했으며 직장에서 낚시 비용의 일부를 부담하는 경우가 많았다. 1954년 창설된 산업은행 낚시회는 격주 1회씩 낚시를 함께 즐겼으며 회비는 일절 받지 않고 밤낚시나 자체 대회를 하기 위한 비용은 은행에서 보조를 받아 운영했다(Naksi Chunchoo, 1971. 7: 120). 직장 낚시회가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이들을 대상으로 한 낚시 대회도 생겨났다. 1963년 반도낚시회는 조선일보의 후원을 얻어 제1회 실업낚시대회를 열었다. 하지만 공기업, 은행, 제약회사 등을 중심으로 생겨난 직장 낚시회는 대체로 엘리트 화이트 컬러들에게만 문호가 개방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다.
실질적으로 1960-70년대 낚시회의 부흥을 이끈 낚시회들은 낚시 용품점을 중심으로 조직된 경우가 많았으며 이들은 낚시 용품 판매 수익과 회원들의 회비로 운영됐다. 이런 종류의 낚시회는 회원 유치 경쟁 속에서 새로운 낚시터의 개발이나 낚시 기술의 향상을 가져왔으며 단체로 버스를 대절해 낚시터로 가는 현상을 대중화시켰다. 이에 따라 매주 일요일마다 출조(出釣)를 하는 낚시회는 관광버스 회사들의 단골 고객이 됐고, 봄과 가을철 낚시 성수기에 관광버스 회사들은 가격 인상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 일부 재정이 탄탄한 낚시회에서는 아예 자가용 버스를 임대해 낚시를 하러 가기도 했다(Chosun, 1973. 3. 2).
이 같은 낚시회의 번성은 낚시터 쏠림현상이라는 부작용을 만들었다. 서울에서 가까운 몇몇 유명 저수지에서 몰려들어 물고기를 잡기 힘들었던 낚시인들에게 1960-70년대 저수지는 대부분 이상적인 낚시터가 아니었다. 이는 수많은 낚시 클럽이 생기면서 낚시 문화가 바뀐 산업혁명시기의 영국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미 19세기 중반 영국 런던과 셰필드에서는 선술집(pub)을 매개로 한 수많은 낚시 클럽들이 생겨났다. 주로 남자들끼리의 유대감 강화와 친목도모를 위해 낚시 클럽에 가입한 회원들은 번잡한 낚시터에서 낚시를 해야 했기 때문에 더 이상 고독하게 상념에 잠겨 ‘세월을 낚는’ 낚시인들이 아니었다(Lowerson, 1989).
이 같은 상황에서 고속도로의 개통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일요일 당일치기 낚시를 즐기는 대부분의 수도권 지역의 낚시인들은 그 때까지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의 유명 낚시터를 집중적으로 찾는 경향을 보였지만 고속도로의 개통과 함께 보다 먼 지역에 위치한 낚시터를 찾을 수 있게 됐다(Naksi Chunchoo, 1971. 8: 48).
한편 1969년 서울 시내 낚시회는 80여 개가 될 정도로 늘어났지만 상당수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많은 낚시회가 고정회원제가 아니라 주중에 회원을 유치해 일요일에 단체 낚시를 하는 경우가 많았고, 치솟는 낚시 용품점 유지비와 버스 값 등의 증가가 원인이 되어 적자 때문에 이를 보충해야 하는 각 낚시회의 임원진들은 경제적 부담이 컸다(Maeil Gyungje Shinmun, 1970. 3. 24). 또한 낚시회들은 회원을 늘리기 위해 출혈을 감수하면서 출조비 인하경쟁을 펴는 경우가 많아 1972년 초봄 낚시회의 숫자는 120여 개가 넘었지만 가을 들어 해체되는 곳이 늘어나기 시작했고(Maeil Gyungje Shinmun, 1972. 9. 5),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상품을 미끼로 회원을 모집하기도 했다(Kyunghyang Shinmun, 1979. 11. 20).
이처럼 1960-1970년대 낚시회는 사교와 친목도모를 목적으로 하였는데, 이는 집단활동 위주로 즐겼던 여가행태를 잘 보여준다(Choi, Kim & Choi, 2003). 또한 낚시용품점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상업화 경향이 짙었는데, 당시 여가는 공업화과정에서의 정신적 스트레스와 도시 혼잡을 피하기 위한 행태가 필요한 시점이기도 했지만(Korean culture and Tourism Institute, 2007), 고속도로 개통으로 1일 권 낚시터가 늘어난 점이 낚시회의 증가와 상업화의 시대적 배경이 된다.
신문과 잡지는 1960-1970년대 한국의 낚시 대중화에 기여한 부분이 컸다. 이는 자사가 개최하는 낚시대회 기간이나 낚시 시즌 오픈과 결산을 해야 하는 시기에만 주로 낚시 관련 기사를 간헐적으로 다뤘던 1950년대 신문과는 다른 접근이었다. 매일경제신문은 1967년부터 낚시 면을 만들었으며, 1971년 전국 낚시 대회인 제1회 봉황컵을 개최할 정도로 여가 스포츠 중 특히 낚시에 많은 관심을 쏟았다(Maeil Gyungje Shinmun, 1971. 7. 5). 1969년 창간된 국내 최초의 스포츠·레저 전문 일간지 일간스포츠도 낚시에 매주 1~2회 고정지면을 할애하며 낚시대중화에 한 몫을 했다. 이후 낚시를 즐기는 독자들을 끌기 위한 일간지들의 보도 경쟁이 심화되던 1971년에는 국내 최초의 낚시 전문잡지 「낚시 춘추」가 창간됐다. 이는 1960년대 후반 창간된 여가 스포츠 관련 잡지인 「산」, 「바둑」, 「모던 테니스」와 마찬가지로 경제성장에 따라 취미생활을 즐기고자 하는 대중이 많아졌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창간호 때 3천 부를 발행했던 이 잡지는 82년에는 발행부수 1만 부 정도의 정기간행물로 성장했다. 이는 당시 여가 스포츠를 다루는 잡지 가운데 3만 부 이상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던 「바둑」에 이은 2위에 해당하는 숫자였다(Donga Ilbo, 1982. 11. 26). 이렇듯 주기적으로 게재된 신문의 낚시 관련 소식과 낚시 전문지의 출현은 낚시인들에게 필요한 관련정보를 제공을 했을 뿐 아니라, 회원 유치 경쟁을 하던 낚시회 자체의 홍보수단으로 중요하게 대두됐다.
낚시인구가 늘어나면서 낚시터에서도 상업화 현상이 나타났다. 정부가 새마을 소득증대 사업의 일환으로 1970년부터 추진해 온 내수면 종합개발 계획은 양어장 설립과 낚시터의 유료화 등을 근간으로 했다. 1974년 200만 명으로 평가될 만큼 낚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이에 정부는 20여개의 유료 낚시터를 지정해 낚시터 주변의 상업화를 촉진시켰으며, 내수면 보호조치의 일환으로 상급 저수지 중 1백40개소와 치어를 방류한 3백개소에서 낚시를 금지시키는 적극적인 저수지 관리 정책을 폈다(Kyunghyang Shinmun, 1974. 11. 7). 이로써 인근에 잘 알려진 낚시터를 갖고 있는 농촌 지역에는 낚시를 하러 온 도시민들을 상대하는 상인들이 생겨났고, 낚시인들에게 숙박료, 도선료(渡船料), 좌대 사용료 등을 받아 부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Maeil Gyungje Shinmun, 1967. 10. 17).
한편 내수면 종합개발 계획은 낚시인들의 증가로 인해 발생한 담수어 자원의 고갈 문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어족자원이 부족하게 되면 낚시를 즐기기 힘들어지는 낚시의 고유한 특징 때문이었다. 1970년대 낚시인들의 어족자원남획과 관련돼 가장 중요한 이슈는 치어 방류문화 확산 움직임과 보트 낚시금지였다. 1971년 낚시인들 사이에서 어족자원 보호를 위한 치어의 방류에 대한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각 낚시회의 친선대회가 치어를 포함해 당일 낚시인이 잡은 전체 물고기의 중량으로 순위기 매기는 중량상 제도에서 대어상 제도로 옮겨가기 시작했다(Maeil Gyungje Shinmun, 1971. 11. 2). 그리고 전국낚시연합회는 보트 낚시로 인한 폐해를 줄이기 위해 1976년 보트 낚시를 각종 낚시 대회의 시상에서 제외하기로 결의했고, 1978년 수산청은 댐, 강, 호수를 제외한 저수지에서의 보트 낚시를 금지시켰다(Maeil Gyungje Shinmun, 1976. 4. 27; 1978. 5. 2).
이처럼 1970년대를 여가개발독재 시기라고 볼 때(Choi, 2005), 낚시터의 상업화는 어족자원을 늘려 농촌마을의 수익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내수면종합개발계획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이 정책은 늘어나는 도시의 낚시인들이 농·어민들의 소득증대를 위한 새마을 사업에 공헌할 수 있다는 판단과 맥이 닿아 있다(Naksi Chunchoo, 2001. 3. Special Supplement: 93; 매일경제신문, 1975. 5. 13).
3. 낚시문화 전환기(1980-1989)
통행금지 해제와 마이카 시대의 개막으로 대표되는 1980년대는 한국 낚시 문화의 엄청난 변화를 이끌어 냈다. 1982년 시행된 통행금지 해제는 Kang(2006)이 지적한 것처럼 심야극장 등을 필두로 한 본격적인 밤 문화의 탄생을 의미했다. 특히 낚시인들에게는 새롭게 주어진 밤 문화가 중요했다. 통금해제 전까지 일요일 새벽 4시 반에서야 출발할 수 있었던 당일치기 낚시는 갈 수 있는 낚시터에 한계가 있어 많은 낚시인들이 몇몇 유명 낚시터에 몰렸다. 이들은 그 동안 ‘물 반사람 반’의 아비규환 속에서 물고기를 잡느라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낚시업계에서는 통금해제를 향후 잠재적 낚시 인구를 늘릴 수 있는 축복으로 생각했다(Kyunghyang Shinmun, 1982. 2. 9). 이와 동시에 1980년대 개막한 소위 ‘마이카 시대’는 그 동안 낚시문화의 선도적 역할을 해왔던 낚시회를 쇠퇴시켰다. 낚시회의 전세 버스를 통해 낚시터로 가는 사람들이 현저하게 줄어들면서 낚시회는 재정적으로 더 어려움을 겪으면서 사양길에 접어든다. 통행금지 해제와 마이카시대 도래라는 시대배경은 잠재적 낚시인구유입 가능성과 낚시회 쇠퇴라는 낚시문화의 전환기적 특징을 보여준다. 이는 낚시회가 줄어든 반면 잠재적 낚시인구 유입과 개인, 가족, 그리고 소수의 동호인 중심으로 낚시문화가 이동하는데 크게 영향을 미쳤다.
1980년대는 대청호, 충추호 등 대형수면의 등장으로 낚시가 호황기를 누릴 수 있었다. 1986년 국내 최대 수 면적을 자랑하는 충주호의 준공이후, 대부분의 전국 낚시회는 주말에 충주호로 향했다. ‘내륙의 바다’로 불릴 정도로 탁 트인 경관을 갖춘 충주호는 수심이 깊어 손맛이 좋을 뿐 더러, 수질이 깨끗하고 활성이 좋은 붕어도 끊임없이 잘 잡히는 낚시인들의 명소였다(Kyunghyang Shinmun, 1987. 8. 14; Donga Ilbo, 1989. 8. 11). 하지만 이후 낚시인들의 과도한 충주호 쏠림현상과 이에 따른 불법 상업행위는 충주호에 악영향을 끼쳤으며, 심각한 수질오염 문제를 유발했다(Maeil Gyungje Shinmun, 1989. 8. 7). Choi(2009)이 지적한 바와 같이 충주호의 쇠퇴는 관리가 수반되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낚시’가 더 이상 한국에서 불가능해졌다는 점을 보여줬다. 이 시기 또 다른 특징은 대도시 근교에 들어서기 시작한 양어장 낚시의 유행이었다. 바쁜 현대인들이 즐기기에 적합한 양어장 낚시터는 1980년대 중반 서울 근교에만 40여 개가 생겨날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양어장 낚시터는 일반유료 낚시터에 비해 최소한 두 배 이상의 비용이 들지만 도시에서 접근성이 좋고, 비교적 쉽게 고기를 낚을 수 있기 때문에 활성화 됐다(Monthly Angling, 1985. 10).
한편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의 성공적 준비를 위한 도시 미화 정책의 일환으로 시작된 한강종합개발은 폐수로 오염됐던 한강을 낚시의 명소로 바꿔 놓았다. 1986년 여의도 한강 둔치에서는 휴일이면 2백 명의 태공들이 낚시를 즐겼으며 워커힐 맞은 편 풍납동 한강 둔치에도 1백여 명의 낚시인들이 몰릴 정도로 한강에서의 낚시는 인기를 끌었다(Kyunghyang Shinmun, 1986. 6. 17). 하지만 일부 낚시인들이 미끼를 마구 던져 강물을 오염시켰고, 시설물들을 훼손하자 서울시는 한강 10개 지역에서만 낚시를 제한적으로 실시하도록 조치를 취해야 했다(Donga Ilbo, 1986. 6. 4). 한강개발로 인한 한강에서의 낚시 재개는 낚시인들에게 희소식이었지만 한국 전통 낚시인 견지낚시는 이 시기에 한강에서 사라졌다. 한강개발로 강변 양안에 콘크리트 블록이 설치되고, 유람선 운항에 필요한 수위를 확보하기 위해 수중보를 건설하면서 한강의 물 흐름이 약해지자 더 이상 견지낚시를 하기 힘들어 졌다. 더욱이 정부는 뚝섬, 광나루 등에 있던 ‘마상이’로 불리는 견지낚시를 하기 위한 배를 모두 철거하는 등 한강에서 견지낚시 자체를 금지시켰다(Bae & Lee, 2006).
1980년대는 민물낚시가 주요 장소였던 저수지에서 대형수면과 양어장 낚시터로 그 유행이 변화한 시기다. 이 같은 현상은 낚시인들의 쓰레기 투기로 발생된 낚시터 주변 환경오염과 과도한 낚시행위로 인한 어족자원 감소가 다시 낚시에 적합한 장소를 찾는 변화로 이어진 것이다. 또한 올림픽 준비를 위한 한강의 기적을 통해 새로운 낚시장소가 발굴되는 등 낚시장소가 다양해지는 특징을 가진다.
4. 다양한 낚시문화 공존기(1990-1999)
1990년대 기후에 관계없이 가까운 도심에서 짬을 내어서 즐길 수 있는 실내 낚시터가 대유행했다. 밀폐된 실내공간에서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여가를 소비하고자 하는 풍조가 생겨난 1980년대 성인오락실, 소극장과 가라오케 술집 등의 유행을 이어받은 실내낚시터라고 할 수 있다(Kang, 2006). 실내 낚시터의 유행은 서울 뿐 아니라 지방 읍면 단위의 지역에도 건물마다 실내낚시터를 만들기 위해 개조공사가 이루어질 정도였다(Kyunghyang Shinmun, 1992. 8. 27). 낚시인들이 도심에 위치한 실내 낚시터를 찾는 이유는 시간적으로 큰 부담이 되지 않았고, 낚시용품을 준비할 필요가 없어서였다. 하지만 수질오염 등으로 낚시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이 갈수록 악화되면서 낚시인들이 손쉽게 물고기의 입질을 느낄 수 있는 곳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시멘트 바닥에서 팔딱거리는 물고기를 잡는 모습이 생활에 찌든 현대인을 보는 것 같아 유감이라는 비판적 주장도 있었지만 시대 변화에 맞춘 실내 낚시터의 탄생을 옹호하는 쪽도 있었다(Maeil Gyungje Shinmun, 1990. 12. 9). 하지만 실내 낚시터의 진짜 문제는 규제의 근거가 미흡해 단속이 소홀한 틈을 노리고 회, 매운탕, 술을 팔고 금반지, 시계, 컬러 TV 등을 경품으로 내거는 등 낚시장을 찾는 사람들의 사행심을 부추기며 호객행위를 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했다는 점 때문이었다(Kyunghyang Shinmun, 1991. 3. 11). 이러한 불법 실내낚시터 성행은 낚시의 대표적인 불건전 사례로 낚시의 부정적 이미지에 영향을 주었다.
1990년대 이전까지 낚시인들은 여가 활동으로 낚시를 즐겼고, 직업적으로 낚시를 하는 부류는 어업종사자들뿐 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는 프로 낚시선수가 출현했다. 낚시의 프로화는 낚시 용품사에 의해 이뤄졌다. 낚시 용품사는 자사의 상품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 프로 낚시인을 선발해 고용했다. 이 같은 변화는 여가 낚시가 경기 낚시로 전환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1996년 낚시 용품사 삼원레저는 제1회 코리안컵 바다낚시 프로선발전을 개최하고 이 대회에서 입상하는 선수들을 광고 모델을 겸한 회사 소속 프로선수로 활용할 것이라는 계획을 발표했다(Hankyorae Shinmun, 1996. 10. 31). 이들은 ‘필드 테스터’라고 불렸으며 낚시 용품을 현장에서 직접 사용하며 계약에 따라 소속사의 상품 홍보모델도 겸하였고, 1997년부터 불기 시작한 프로 배스토너먼트 대회를 통해 본격화됐다(Naksi Chuncoo, 2001. 3. Special Supplement). 1990년대 이후 낚시 장르도 함께 다양화되면서 낚시 종합지가 아닌 바다낚시, 루어낚시, 배스낚시 등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잡지가 창간됐고, 낚시 관련 비디오의 출시와 함께 낚시 전문 케이블 TV 방송국도 개국했으며, 많은 종류의 낚시 관련 인터넷 홈페이지와 인터넷 낚시 방송까지 출현했다(Naksi Chuncoo, 2001. 3. Special Supplement).
5. 낚시문화 과도기 (2000-현재)
지역축제에 관심이 높아진 것은 지방분권화 정책이 본격화된 1990년대 후반부터라고 할 수 있지만 낚시와 지역축제가 접목되면서 대중들에게 주목을 받은 것은 2000년대 이후가 확연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낚시가 인기 관광 상품으로 변모하기 시작하면서 그 특징이 두드러진다. 1970년대 유명 낚시터 인근 지역주민들의 소득증대를 위해 낚시터 유료화 정책이 시작된 이래 그 필요성이 계속 제기돼 왔던 낚시의 관광자원화 시대가 열린 셈이었다. 안동시는 한 때 토종어류를 먹어 치워 생태계 파괴의 주범이었던 외래어종 배스를 관광 상품화 했다. 국내외 낚시인들이 참가한 가운데 연간 6~7회 정도의 배스낚시대회를 개최했던 안동시는 배스 낚시인들이 1년에 대회 참가 기간 중 소비하는 액수가 10억 원에 육박할 정도로 낚시 자원의 관광 상품화에 성공했다(Maeil Gyungje Shinmun, 1998. 8. 13). 그리고 겨울철 별미로 손꼽히는 빙어를 낚으려는 낚시인들이 급증하면서 인제군에서 1998년 빙어낚시 축제 이벤트를 시작했다. 온 가족이 참여하는 관광 상품으로 개발된 빙어낚시 축제는 빙어 낚시를 하는 동안 썰매타기와 가족대항 빙어 튀김 만들기 대회도 프로그램에 넣기도 했다(Kyunghyang Shinmun, 1998. 2. 10). 해마다 1월에 펼쳐지는 이 축제는 2013년에는 78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할 정도로 성장했다(Seoul Shinmun, 2013. 1. 29). 2003년 생겨난 화천 산천어 축제는 낚시를 테마로 한 최대 규모의 축제로 성장하며 지역 경제에 긍정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관광객 1백만 명 이상을 유치하고 있는 산천어 축제에는 44개의 여행사가 참여할 정도로 상품성 있는 행사로 자리매김했으며, 가장 인기 있는 대표적인 프로그램은 산천어 얼음낚시이다(Ministry of Culture, Sports and Tourism, 2010).
바다낚시는 낚시인구의 증가로 인해 비좁아진 저수지 낚시터에서 벗어나 좀 더 쾌적한 자연환경 속에서 역동적인 낚시를 즐기려고 하는 낚시인들의 욕구에 의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바다낚시는 어선을 활용해야 한다는 특징 때문에 민물낚시에 비해 비용이 많이 발생하기는 했지만 산업적 측면으로 보면 어선 대여업 등을 통해 수익 창출을 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1990년대 적지 않은 어촌에서는 바다낚싯배의 대여를 통해 부가 수익을 올렸다(Maeil Gyungje Shinmun, 1992. 9. 3). 생활수준의 향상과 자연친화적 여가에 대한 관심증대로 이 시기 바다낚시는 성장세에 있었다. 전국적으로 2,825척의 낚시어선이 118억 원의 수입을 올렸다는 1997년도 해양수산부의 보고는 이를 잘 반영하고 있다(Ministry of Oceans and Fisheries, 1998).
하지만 바다낚시가 어촌관광이나 해양여가 산업의 주요 프로그램으로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부터였다. 전 국민의 대다수가 거주하고 있는 수도권과 인접한 경기도의 어촌은 바다낚시로 인한 관광특수를 경험한 대표적 지역이다. 2000년 13,019명이었던 경기도 바다낚시 이용객은 2012년 상반기에만 23,674명으로 늘어났으며 이에 따라 낚시어선의 총수입도 증가했다(Maeil Gyungje Shinmun, 2012. 10. 25). 경기도의 성공원인은 수도권과의 접근성도 중요한 이유였지만 도의 예산지원을 통해 화장실, 휴게실 등을 구비한 바다낚시 전용선을 건조했으며 지속적으로 어족자원을 풍부하게 하려는 도의 노력이 주효했기 때문이었다(Maeil Gyungje Shinmun, 2012. 10. 25; Kim, Hong & Park, 2001).
2000년대 후반 늘어나는 수상여가 수요에 발맞춰 해양수산부가 중심이 돼 밑그림을 그린 권역별 마리나 거점항 개발계획에서도 바다낚시는 중요하게 다뤄졌다. 그 핵심은 청소년과 부녀자 등 가족단위의 바다낚시를 활성화하기 위해 해양낚시공원을 조성한다는 것이었다(Hankook Gyungje Shinmun, 2007. 6. 25). 하지만 체험형 여가의 한 형태로 바다낚시의 대중화를 도모하기 위해 설치된 해양낚시공원을 통한 지역경제의 활성화는 아직 요원한 상태다. 34억 원을 들여 조성된 울산 당사해양낚시공원의 경우 2013년 11월에 유료 낚시객 숫자가 399명에 불과할 정도로 개점휴업 상태였다. 당사해양낚시공원의 낚시인들이 몰리지 않은 주원인으로는 주변 방파제 등에서 무료로 바다낚시를 즐길 수 있는 곳이 많이 존재한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Kyungsang Ilbo, 2013. 12. 26). 이런 이유로 막대한 건설자금이 필요한 낚시공원의 실효성에 대한 논란이 거세지고 있는 상황이다.
Ⅲ. 낚시문화의 여가적 특성
본 연구의 목적은 낚시문화의 여건변화를 시대별로 살펴보고 그에 따른 여가적 특성을 도출해보는데 있다. 앞서 살펴본 낚시문화의 시대별 여건변화에 따르면, 1960년대 이전 근대적 여가로서의 낚시가 등장하였으며, 1960년대부터 낚시회를 중심으로 낚시문화는 정착기를 맞았다. 1980년대 이전까지 낚시회를 중심으로 한 용품의 산업화, 미디어보도의 증가 등 낚시는 호황기를 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통행금지해제와 마이카시대가 도래하면서 낚시회를 중심으로 참여하는 행태가 줄어들고 소규모 또는 개별적으로 낚시를 다니게 되면서 낚시회가 쇠퇴하였다. 그리고 낚시터의 환경오염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낚시문화는 전환기를 맞았다. 1990년대 이후에는 짧은 시간 동안 여가를 소비하는 풍조로 볼 수 있는 실내낚시터가 유행하고, 프로화가 시도되는 등 다양한 낚시문화가 함께하는 공존기에 이른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 해양담론이 등장하고, 건전한 낚시문화에 대한 법제도가 마련되는 등 낚시문화에 대해 정책적으로 논의되면서 낚시의 규제와 활성화가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특히 지역경제활성화를 위한 관광상품화가 활발히 진행 중이다. 이에 지금을 낚시문화의 과도기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낚시문화 형성부터 공존기에 이르기까지의 낚시문화 여건변화를 살펴봤을 때, 주요한 여가적 특성 세 가지를 논의점으로 제시할 수 있다. 첫째, 낚시는 남성 중심적인 여가이며 둘째, 환경오염 문제에 취약한 여가라는 점이다. 그리고 셋째, 시간소비형 여가라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이 세 가지는 200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 낚시문화 과도기에서 나타고 있는 주5일 근무제 정착, 해양여가 담론, 낚시 육성법, 지역경제 활성화 등의 시대배경과 낚시여건 변화와 맞물려, 대중 친화적 여가를 위한 낚시의 전략적이고 정책적인 시도에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1. 남성 중심적인 여가
낚시의 특징 가운데 여성들의 참여도가 적다는 부분은 가족중심의 여가 스포츠로 발전하는 데 있어서 큰 걸림돌이 됐으며, 주말에 가족들을 두고 혼자 낚시 여행을 떠나는 아버지는 가족들과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1994년 1천5백 명을 대상으로 시행된 낚시인 성향조사에서 75%의 응답자가 낚시 문제로 가족들과 크고 작은 갈등을 겪는 것으로 분석됐으며, 이 설문조사에 응답한 낚시인 가운데 여성은 7명에 불과할 정도로 여전히 낚시는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Hankyorae Shinmun, 1994. 4. 22). 낚시는 실제로 남자만이 가질 수 있는 취미라고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일요 과부’라는 유행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서울 낚시회는 1963년 국내 최초로 ‘부부낚시대회’를 열었고, 다른 낚시회에서도 비슷한 성격의 대회를 개최했지만 실제 효과는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 진다(Kyunghyung Shinmun 1963. 6. 4; 1968. 11. 9). 여성이 배제된 채 남성 중심적으로 발전한 낚시 문화의 특징은 잉글랜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McKibbin(1998)은 잉글랜드 남성 낚시인들에게 낚시의 숨겨진 매력 중 하나는 가족으로부터 탈출을 가능하게 해줬다는 것으로 봤으며, 이런 이유로 “많은 가정주부들은 2차 대전 이전에 그들이 축구나 럭비를 싫어했던 것만큼이나 낚시를 싫어했다”고 지적했다.
여성들의 참여도와 가족 여가라는 측면에서 테니스와 등산은 남성 중심의 여가 스포츠인 낚시와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중산층 근로소득자들이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기 시작한 1970년 대에 테니스는 여성 참여자의 급격한 증가로 ‘부부테니스 전성시대’를 이끌었다(Kyunghyung Shinmun, 1976. 9. 24; 1976. 9. 28). 또한 등산은 1980년대 후반 평일에 도봉산, 북한산, 관악산 등에서 5~6명씩 짝을 지어 등산을 하는 주부들은 꽤 있었을 뿐 더러 부부가 함께 주말에 아이를 데리고 산행을 하는 것은 일반적이었으며, 스마일 산악회는 40~70대의 주부 회원들이 4백 명이나 됐다(Hankyorae Shinmun, 1989. 4. 30). 이렇듯 낚시는 여성과 가족보다는 남성 개인이 중심이 된 여가로 대표된다고 할 수 있다.
2. 환경오염 문제에 취약한 여가
특정시대를 막론하고 낚시는 환경오염과 어족자원 고갈이라는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이와 같은 낚시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1990년대 환경보호에 대한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높아지면서 악화된 것으로 보여 진다. 더욱이 이 시기에 낚시인 일부는 ‘쓰레기 꾼’이라는 대중적 인식이 각종 뉴스 보도를 통해 확산됐다(Donga Ilbo, 1994. 7. 29). 하천에 버려져 물을 썩게 하는 떡밥, 저수지 주변에 버려지는 쓰레기 등의 문제로 낚시인을 바라보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바꾸고자 낚시업계는 자체적으로 1993년 ‘낚시터 청소의 날 행사’를 갖고 수질을 오염시키는 떡밥의 사용을 자제하자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Naksi Chunchoo, 2001. 3. Special Supplement). 하지만 ‘낚시인들이 수질오염의 주범’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환경부는 1995년 낚시터 주변의 각종 환경오염을 막기 위한 낚시 면허제 도입 계획안까지 발표했다. 낚시 면허제는 낚시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수질오염 문제, 잡아서는 안 되는 물고기 등에 대한 기본교육을 실시한 뒤 면허세를 납부하고 면허를 발급 받은 사람만이 낚시를 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로 추진됐다(Donga Ilbo, 1995. 5. 8). 하지만 낚시가 수질오염의 주요원인이 아니며 낚시 면허제는 낚시업계의 활동을 위축시키기만 할 것이라는 전국낚시연합회의 주장과 환경부의 입장이 첨예하게 충돌하면서 1997년 낚시 면허제 도입은 백지화됐다(Naksi Chunchoo, 2001. 3. Special Supplement, 94-95).
하지만 대규모 낚시터가 등장하고 자가용 보급이 확산되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한국의 낚시풍토는 유명 낚시터 쏠림현상 등, 환경과 어족자원 보호와는 배치되는 경향을 보인 게 사실이었다. 특히 어족자원 보호 문제는 심각하게 대두됐다. ‘붕어보다 낚싯대가 더 많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비좁은 저수지 낚시터에서 낚시인들은 물고기를 최대한 많이 잡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Donga Ilbo, 1995. 5. 8). 이는 낚시용 어족자원이 줄어들면 결국 낚시가 침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망각한 행동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Naksi Chunchoo, 2011. 1; Choi, 2009). 친화적인 여가 즉, 자연을 기반으로 하는 아웃도어 레크리에이션 활동은 여가향유와 환경보존 조화 문제에서 갈등구조를 갖고 있다(Kim, 2010). 특히 낚시는 수질오염뿐만 아니라 어족 자원의 고갈문제에도 매우 민감하다. 이러한 점은 낚시를 여가로 참여하는 사람들의 환경에 대한 태도와 실천에 관한 심도 깊게 논의되어야할 부분이다.
3. 시간 소비형 여가
낚시가 대중화하는 데에 있어 또 다른 걸림돌은 짧은 시간동안 즐기기 힘든 여가 스포츠 중 하나였다는 점이다. 1970년대 고속도로의 개통 등 교통의 발달로 낚시터까지 가는 시간이 많이 단축되기는 했지만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낚시를 하려면 여전히 상당한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1970년대부터 테니스, 배드민턴, 볼링, 탁구 등 도시에서 즐길 수 있는 여가 스포츠의 종류가 급격히 늘어나 이들과 경쟁관계에 있던 낚시가 양어장 낚시나 실내 낚시로 그 형태를 다변화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낚시 애호가의 입장에서 이런 인공적 형태의 낚시를 통해 낚시의 참맛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형태의 낚시의 유행은 지속되지 못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주5일제 근무제가 정착된 뒤 대중들의 여가시간이 늘어난 점은 시간 소비형 여가 스포츠인 낚시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Schneider & Wait, 2005). 지역축제와 바다낚시 등 관광과 결합한 형태의 낚시가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나타나면서 낚시는 대중에게 좀 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4. 대중 친화적 여가를 위한 향후 낚시문화
과거 여가로서의 낚시 특성으로 도출된 남성 중심적이고 환경오염문제에 취약하다는 점 그리고 시간소비형 여가라는 점은, 앞으로의 대중친화적인 여가를 위한 낚시문화 형성에 중요한 단초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낚시는 주5일 근무제 정착으로 인해 전반적인 라이프스타일이 변화하고 특히 가족여가, 체험형 여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여가트렌드 속에서 어떻게 적응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Yoon, 2004; Lee, 2004). 같은 맥락에서 해양여가와 낚시의 수요증가 예측(Yoon, 2001)은 관광상품화와 지역경제활성화 측면에서 논의 중이다. 그리고 자연을 기반으로 하는 여가 활동인 낚시가 남성 중심의 활동에서 가족친화적인 활동으로 확장되기 위한 여가서비스나 프로그램 등이 논의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한편 낚시는 환경오염문제에 취약하다는 점에서 낚시를 통한 환경태도 및 실천 행동 향상을 위한 여가교육은 중요한 콘텐츠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여가시간의 활용과 관리가 여가의 질을 높이는데 매우 중요한 문제다(Korean Culture and Tourism Institute, 2007). 이에 시간소비형 여가인 낚시는 여가의 질을 높이기 위한 여가시간의 활용과 관리 측면에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관한 추후 연구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대중 친화적이라는 의미에서도 남성위주의 여가가 아닌 가족을 중심으로 하고 시간소비형 여가의 장점을 살리고, 환경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여가로 발전할 필요가 있다.
Ⅳ. 결론
본 연구의 목적은 낚시문화의 여건변화를 시대별로 살펴보고 그에 따른 여가적 특성을 도출하는데 있었다. 낚시문화를 시대별로 형성기-정착기-전환기-공존기-과도기로 나누고 각 단계의 시대배경과 낚시여건 변화를 살펴보았다. 이러한 낚시문화의 단계적 변화에 따라 남성 중심적 여가, 환경오염문제에 취약한 여가, 시간소비형 여가 등의 여가적 특성을 도출하였다.
낚시는 철도 등 교통수단이 발전하기 시작한 일제강점기에 경성을 비롯한 도시민들에게 근대적 여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1950년대부터 낚시는 인맥형성이나 사교의 수단으로 활용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1970년대에 나타난 낚시회의 유행은 도시화와 산업화가 본격화되면서 단체로 버스를 타고 복잡한 도시를 떠나 회원들과 친목을 도모하려는 도시인들의 자연스러운 욕구가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낚시회는 1980년대 마이카 시대의 개막으로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이때부터 낚시는 주로 친구들과 소규모로 즐기는 경향이 뚜렷해졌고 사교적인 목적도 약화됐다. 이 시기에 골프는 낚시를 대신해 대표적 사교 스포츠로 등장했으며 1950년대 후반 낚시와 마찬가지로 유력인사와 인맥을 형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됐다.
도시를 탈출해 자연 속에서 고독하게 즐기는 낚시 고유의 성격은 1980년대에 위기를 맞았다.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들의 여가 패턴에 맞춰 비교적 도시에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양어장 낚시가 성행했으며 이후 1990년대에는 도심에서 낚시를 즐길 수 있는 실내낚시가 사회현상으로 나타났다. 양어장 낚시나 실내낚시는 도시탈출과는 거리가 먼 낚시형태였다. 하지만 간편하게 즐길 수 있는 많은 여가 스포츠들이 활성화된 상황에서 나타난 낚시업계의 자구책이기도 했다.
낚시로 인한 환경오염 문제가 본격화 된 것도 1980년대였다. 이 시기에 충주호 등 대형수면에서 민물낚시를 하는 낚시인구가 급증해 불법좌대로 대표되는 상업화 현상과 수질오염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됐다. 결국 1990년대에 이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정부는 낚시면허제 도입을 추진했지만 낚시계의 반발로 백지화됐다. 하지만 미디어를 통해 낚시와 관련된 환경오염 문제가 빈번하게 다뤄지면서 낚시의 부정적 이미지는 고착화됐다.
2000년대 주5일제 실시와 함께 가족여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낚시는 관광 상품화되기 시작했으며 바다낚시의 산업화도 가속화됐다. 지방자치단체가 경쟁적으로 추진한 지역축제의 소재로 등장한 낚시는 낚시 애호가들의 입장에서는 진정한 낚시가 아니었지만 남성 중심적 성격의 낚시가 가족 여가로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이와 함께 민물낚시에 비해 역동적이며 체험여가로 더 적합한 바다낚시가 해양여가의 주요 테마이자 어촌 소득증대의 수단으로 등장하면서 낚시는 관광과 더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됐다.
사교적 모임 성격의 낚시회가 쇠퇴한 뒤 낚시는 최근까지 지속가능한 패러다임을 제시하지 못한 채 표류했으며 다른 여가 스포츠의 성장으로 위축되는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낚시는 건전한 낚시문화 창조를 위한 낚시 서비스의 개선과 낚시 산업 육성을 골자로 2012년 제정된 「낚시관리 및 육성법」으로 새로운 전환점에 서 있다. 이와 관련해 본 연구에서 제시한 남성 중심적이며 환경오염 문제에 취약했던 낚시가 이를 개선하려면 관광과의 적극적인 연계를 바탕으로 한 복합여가산업화가 필요하다고 보여 진다. 관광과의 결합을 통해 낚시가 낚시 애호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쉽게 즐길 수 있는 가족여가나 체험여가의 한 형태로 전환하는 것은 낚시의 대중친화력을 제고할 수 있는 출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본 연구는 낚시에 대한 시대별 여건변화를 살펴보는데 있어 일간지와 잡지만을 활용하여 결과를 도출한 기초자료였다. 추후 연구에서는 이러한 낚시의 사회문화적 흐름에 기초하여 구체적인 연구방법을 활용한 지속적인 연구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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