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여성 여가⋅레크리에이션 교육자로서의 삶 : 박원임교수의 기록중심 구술생애사 연구
Abstract
In this study, we tried to explore the value and meaning of leisure recreation by exploring her and the social phenomenon of her era through the life of Professor Park, Won-Nim, the first female leisure recreation educator in Korea. Park was born in Japan in 1934 and returned to Jeolla-do Gwangju shortly after liberation. She was the first woman recreational educator in Korea to pursue leisure recreation in Japan through Chung-Ang University, followed by Professor Cheongsong Kim Oh-Jung. The history of women 's educational activities in the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of Korea was a natural choice to overcome the crisis of national prosperity, not the issue of gender, in the situation of losing the country under the banner of educational center. I recalled that time and tried hard to live without discrimination between men and women, rather than putting meaning to the words 'first' and 'women'. In order to provide value and hope for the people, I have practiced diverse social activities both at home and abroad. In order to realize the value of leisure, And the importance of home education. In addition, the theory of leisure recreation, behavioral practice and positive change through it are the value and meaning of leisure recreation. Therefore, the Korean Leisure Recreation Society and the Korea Leisure Recreation Association have to find a way to win.
Keywords:
Leisure, Recreation, Biographical study, Oral life history키워드:
여가, 레크리에이션, 전기연구, 구술생애사Ⅰ. 서론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1948년 국제연합(United Nations: UN)은 세계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을 통해 인간의 권리로서 여가권리를 인정하기 시작하였다(여가백서, 2006, p.11). 이를 근거로 1970년에 세계레크리에이션협회(World Recreation Association)는 ‘여가헌장(charter of Leisure)’의 전문과 제 1조에서 ‘모든 인간은 사회적 규범과 가치에 부합하는 여가활동을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인권을 지닌다. 모든 정부는 시민이 여가권리를 인식하고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여가백서, 2007, p.207).
2006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여가진흥을 목적으로 하는 법률이 존재하지 않았고, 최초의 국민여가생활 보고서라 할 수 있는 ‘2006여가백서(문화관광부)’가 발간되면서 여가관련 정책수립과 변화하는 국민의 여가수요에 부응하는 제도적 첫발을 내딛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문화체육관광부는 2018년 6월 ‘국민여가활성화 기본계획’을 발표하였다. 이는 2015년 제정된 ‘국민여가활성화 기본법(약칭:여가활성화법)’ 제7조 ‘여가활성화 기본계획 및 시행계획’에 따른 결과로써 2018년부터 2022년까지 5년 동안 실시될 1차 국민여가활성화 기본계획인 것이다.
이처럼 여가와 관련한 제도적, 법률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나라의 여가정책은 그리 길지 않은 역사를 갖는다. 하지만 법률로 제정되고 사회제도로 자리매김하고 해당 사회구성원인 대중의 주류문화로 인식되기까지는 그 근간이 되었던 계기나 밑거름은 무엇이었을까라는 합리적인 질문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의문은 사회가 우리를 만드는 것과 우리가 우리 스스로와 사회를 만드는 것의 연계를 탐구(김미숙 외, 2011, p.27)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1945년 해방을 맞이하고 1948년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였지만 국가의 위상을 채 갖추기도 전 1950년 한국전쟁발발로 3년간의 전쟁을 통해 국토는 폐허화되었고, 그로 인해 교육은 새로운 과제에 봉착하게 된다. 따라서 그 당시 교육은 전쟁으로 인해 무너진 국민적 정서를 일으키는 것에서부터 경제부흥을 위한 교육의 재정비와 부흥을 강조하였다.(김영우, 1990; 한국교육개발원, 2012에서 재인용, p.27)
바로 이 시기 1960년 한국레크리에이션협회가 설립된다(김오중박사 희수기념논문집, 1995, p. 49). 1959년 일본체육대학, 뉴욕대학교 대학원과 스프링필드(Springfield)대학교 대학원에서 여가·레크리에이션과 체육학을 수학 후 1960년 한국에 처음으로 여가·레크리에이션을 학문적으로 소개한 이가 청송 김오중 교수이다. 그리고 청송 김오중 교수의 뒤를 이어 한국여가·레크리에이션의 계보를 잇는 한국 최초의 여성 레크리에이션 교육자이자 지도자(박원임교수 회갑기념논문집, 1995, 청송 김오중교수 축사)가 박원임 교수이다.
전후시대 국토재건과 경제성장이라는 국가중요시책과 더불어 국민의 안정된 삶을 위해 국가가 주도하는 교육을 통해 여가의식과 여가활동이 전파될 수 있었던 배경, 그리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2018년 ‘국민여가활성화 기본계획’이 발표되기 까지는 정부의 제도적, 법률적 접근이라는 하드웨어가 있었다면 청송 김오중교수와 최초의 여성 레크리에이션 지도자인 박원임교수의 소프트웨어적인 교육적 헌신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2015년 5월 한국엘리트 여성 체육인의 위상을 높이고 한국이 세계 속의 스포츠강국이 되기까지의 한국여성선수들의 헌신과 노고를 기념하는 ‘한국여성체육 100년사’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이는 지금까지 우리나라 체육분야의 역사가 남성중심으로 기술되어왔던 것과 여성체육인에 관한 연구(정현숙, 이미숙, 2011)가 미비한 현실에서 고무적 현상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또한 여성엘리트선수출신이 중심이 되고 있다. 여전히 체육학분야 중 여가·레크리에이션 발전에 대한 인물탐구는 전무한 실정이다. 무엇보다 민족의 암흑기였던 일본식민지에 태어나 격동의 시대를 지내면서 남성들에게 조차 낯선 학문인 여가레크리에이션분야에서 여성 개척자 1세대로의 삶은 개인에게 뿐 아니라 당시 시대상을 유추하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박원임교수의 삶’을 그녀와 관련된 기록과 구술생애사 방법을 통해 한국 여가·레크리에이션 발전에 기여한 바를 고찰하고, 개인의 삶과 사회적 배경의 관련성을 바탕으로 여가·레크리에이션의 가치와 의미를 탐구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Ⅱ. 연구방법
1. 연구자료 수집방법
본 연구는 질적연구방법 중 전기연구(Biographical study)와 구술생애사(Oral life history)연구방법을 병행하였다. 구술생애사 연구방법은 개인의 구체적 생애사를 매개로 당시 사회를 이해하고 사회구조를 재구성하는 방법(이희영, 2005)이다. 따라서 전기연구 측면에서는 박원임교수와 주변인이 보관하는 문서나 기록을 포함하여 학술지와 학술대회자료들을 근거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기술하였다. 그리고 구술생애사연구 측면에서는 한 개인, 즉 박원임교수와의 인터뷰내용과 자료를 근거로 그녀의 삶을 재조명하고 그 안에 투영된 사회상을 탐구해 보고자 하였다. 지난 과거의 체험과 현재 시점에서의 기억이 갖는 괴리감을 극복하기 위해 가능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려 노력하였고, 모든 대화내용은 특정한 인터뷰 뿐 아니라 일상 대화 속에서도 핸드폰을 이용해 녹음하여 그 내용을 공동연구자들과 박원임교수와의 지속적인 확인과정을 통해 사실적 자료들을 담아내려하였다. 또한 그의 개인적 삶이 어떻게 사회적 문화의 주제, 개인적 주제, 제도적 주제와 사회 역사를 반영하는지에 관심을 갖고 개인을 포함한 주변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가능한 객관적 자료들을 수집, 분석하였다. 유사한 방법으로 진행된 여타 연구들에 있어서는 내용의 타당성과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한 연구자와 참여자간의 라포(rapport)형성에 관심을 두지만, 본 연구에 있어서는 반대로 연구자들과 참여자간의 친밀관계로 인한 주관적, 편향적 왜곡에 관심을 두어 객관적 자료만을 바탕으로 하고, 인터뷰를 통한 내용기술에서 있어서도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려 노력하였다.
이를 위한 방법론적 접근에서는 ‘내재적 방법(emic) 즉 안에서 안으로 보는 방식(自內觀內)으로서 본토박이(native)의 관점으로 현상의 세부적인 내용을 확인하면서 외부적 관점(etic) 즉 외부의 전문가가 자신의 과학적인 해석적 방법론을 통하여 한 사회와 문화를 통찰하는 방법(自內觀內)(김정우, 2004)을 통해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도록 노력하였다.
2. 연구자로서의 위치
공동 연구자 모두 대학교 재학시설 박원임교수에게 여가·레크리에이션 이론수업과 무용수업 등을 수강하였으며, 그녀의 영향으로 대학원에 진학 후 현재 모두 대학에서 그녀와 같이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자로의 길을 걷고 있다. 박원임교수와 연구자들의 사제지간의 연은 길게는 40년, 짧게는 28년여 간으로 각자의 인생에 있어 서로의 삶에 일부분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각자의 삶이 개인의 것이 아니듯 서로의 삶이 상호작용을 하며 지금의 모습을 형성하고, 현재의 여가레크리에이션에 대한 가치관을 정립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연구자들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박원임교수와 함께 한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모습들이 공존한다.
One-two-three-four, two-two-three-four.
카랑카랑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와 함께 ‘딱-딱-딱-딱’ 나무스틱이 몸을 부딪치며 만들어 내는 경쾌한 소리가 무용실에 울려 퍼진다. 강의실 책상위에는 한문으로 빼곡한 ‘레크리에이션硏究’라는 제목의 교재가 놓여있고, “여가레크리에이션은 학문의 궁극적 지향점인 인간의 행복추구를 위해 꼭 필요한 학문이다”라고 그 중요성을 설파하는 힘 있는 목소리가 강의실에 가득하다.
Ⅲ. 전기연구(Biographical study)적 사실
박원임교수의 생애와 경력에 대한 내용은 그녀의 이력서 내용을 함께 검토하며 사건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사실여부 검증과정을 실시하였다. 특히 기존이력서의 내용과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구술자료 및 지인들과의 사실관계 확인을 통해 재구성하여 기록하였다. 출생에 있어 생년월일의 경우 기존 이력서에는 1935년 1월 30일 전남해남출신으로 되어있으나 실제 출생은 1934년 6월 9일(당시 소화 9년)오사카에서 출생하였으며 이후 가고시마현 가노야로 이주하여 가노야 초등학교에서 3학년까지 재학하던 중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귀국 후 전라남도 광주 중앙국민학교 4학년으로 입학하였다.
그리고 전남여자 중학교 4년 졸업이라는 부분과 광주여자 고등학교 2년 졸업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학제변경’이라는 이유 외에 특별히 기억하는 부분이 없어 단지 기억에만 의존해 기술하였다.
몰라~ 이랬다 저랬다. 중학교를 다니다가 고등학교를 갔는데 갑자기 학교이름을 바꾼다 그래서 우리가 처음으로 데모를 했지. 뭐 2년을 다니랬다. 몰라~ 암튼 자꾸 바꿔 쌓더라구. 중학교 4년 다니고, 고등학교는 2년 다녔지. 우리가 데모를 해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 때는 광주여고졸업인데 우리 후배들은 전남여고로 다시 바꿔서 다녔어.
그 내용의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참고한 선행연구의 일부를 인용(이영학, 2004, p. 259)하였다.
1949년의 교육법에 의한 신학제는 미군정하에서 실시된 학제를 계승하면서 약간의 변화를 시도한 것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4학년, 고등학교2~4년(중학교 3년 수료 후 입학), 대학 4년 내지 6년(고등학교 졸업 후 입학), 초급대학 4년(중학교 졸업 후 입학)이었다. 이 학제는 1950년 3월 10일에 교육법의 개정을 통하여 고등학교 수업연한을 3년으로 수정했고, 1951년 3월 10일에는 다시 중학교 3년제로 하고, 4년제 초급대학을 폐지하게 됨으로써 기간하게 6-3-3-4제를 완성하게 되었다. 이것이 이 후 현재까지 한국교육제도의 골격이 되었다.
또한 중앙일보 사설 “6-3-3-4 학제개편...무엇인 문제인가”(1981)의 글을 인용하였다.
48년 정부수립과 함께 49년 교육법이 제정되고 학제는 6-4-3-4와 6-4-2-4제로 됐다가 50년에는 6-4-3-4제로 변경됐으나 시행해 보지도 못한 채 51년 교육법 개정으로 수정되어 6-3-3-4제의 기간학제가 수립되었다.
위의 인용 글에서 볼 수 있듯이 1948년부터 1951년까지 4년이라는 기간 동안 이렇게 다양한 교육제도의 변화는 있었던 것은 해방이후 존재하던 일제의 잔재청산과 미군정시기의 미국제도의 정착 그리고 국내교육자들의 주체적 교육가치관이 대립되면서 교육제도의 정착에도 많은 혼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박원임교수의 경우도 1948년에 입학한 전남여중은 6-3-3-4학제에서 1949년 6-4-3-4 학제로 전환되어 중학교 4년을 마치고 졸업한 후 전남여고에 입학하였는데, 전남여고가 1951년 확정된 학제개편(6-3-3-4)과 함께 학교명을 광주여고로 개명하게 된다. 따라서 이전학제(6-4-3-4)에서 중학교4년을 수학한 경우 고등학교를 2년 후 졸업했다는 인터뷰내용은 역사적 사실내용과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그녀는 20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 신생보육학교 유치원 보모양성학교의 교사생활을 시작으로 전남여자중학교에서 8년간 교사로 재직 후 63년에 중앙대학교 체육교육과 입학하였다.
이 후 중앙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교토(경도:京都)에 위치한 경도한국중고등학교에서 한국어교사로 근무하면서, 일본교토대학교(Kyoto university) 교육학부 연구생으로 2년간 레크리에이션을 수학(교토대학교 외국인학생명부 참조)하였다. 당시 일본에 채류하게 된 계기는 대학 졸업과 시기를 같이해 친오빠인 박원복선생이 장학관으로 일본에 파견을 가게 되는데, 이때 가정부의 자격으로 동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집안일을 하면서 한국어교사 그리고 언어에 대한 부담과 신분상의 문제로 정식입학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해당 대학의 교수회의를 거쳐 일반 대학원생과 동일한 과정을 수행하는 조건으로 2년간의 연구생자격을 얻게 되었다.
귀국 후 1972년부터 3년간 고려대학교 시간강사로 재직 후 1975년 고려대학교 체육교육과 교수로 정식임용 되어 25년간 재직하였다. 2000년 정년퇴직 시까지 다양한 교육 및 봉사활동을 하였는데, 한국 최초의 여성단체이며 소비자단체인 한국부인회 5대회장, 한국여가레크리에이션학회 제5, 6대 회장, 한국 트렘포빅스협회장 등이 대표적인 교육활동 및 사회활동이라 할 수 있다.
박원임교수의 생애와 경력에 있어서 연관되는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면, 시민의 소리 사설 <광주전남여성운동사17>호남 최초의 여의사 현덕신(2)에 의하면 “본래 황해도 출신이었던 현덕신이 광주에 신생유치원설립에 이어 신생보육학교 등 후진향성에 힘을 쏟았다”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 여성의사이며 광주에서의 첫 여성의사인 현덕신이 1948년 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아들 상옥의 제의로 여성운동의 일환으로 유치원을 만들었다(주양자, 남경애, 류창욱, 김신명숙, 홍예원, 1974, P. 74)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당시 광주에는 의사이자 유치원설립을 통한 교육활동가이자 그리고 YMCA 제2대 회장이던 현덕신선생의 구국교육활동과 여성운동의 영향으로 많은 여성들이 교육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는 사회적 배경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는 박원임교수에게도 신성보육학교와 모교인 전남여자중학교에서의 교사경험으로 이어지고 8년간의 교사생활 중 비록 모교이기는 하나 고등학교 졸업생인 박원임교수는 전남여중에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다른 여선생들은 전남여고에 재직하며 학력 차에서 오는 차별을 경험하였다고 한다. 그것이 뒤늦게 대학에 진학하게 되는 동기가 되었고, 1963년 중앙대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전라도 광주에서 중앙대학교로 진학하게 된 배경 또한 그 시대의 사회적 배경을 통해 알 수 있다. 중앙대학교 설립자이자 한국의 ‘잔다크’(중앙대학교 홈페이지 ‘중앙대 역사’ 참조)라 불리는 임영신박사는 일찍이 함흥, 회령, 부산, 마산, 전주, 사리원, 밀양 등 전국으로 유치원교육을 확대하고 유치원 교사양성 활동을 펼쳤다. 이렇게 현덕신선생과 임영신박사의 관계에서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신생보육학교와 전남여중에서 교사경험이 있던 박원임교수는 현덕신선생의 권유로 중앙대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동시에 한국부인회(초대 회장이 임영신박사)총무직을 수행하였다. <표 1>과 <표 2>에서 볼 수 있듯이 박원임교수는 1963년 중앙대학교 입학과 함께 한국부인회 총무직을 수행하고, 1986년부터 한국부인회 수석부회장에 이어 1997년에는 제5대 회장직에 취임하게 되는데 이 한국부인회는 앞서 언급한 중앙대 설립자인 임영신박사(전북 금산군 출생)가 1963년에 전국 10개 시도지부와 함께 설립한 명실상부 한국 최초의 여성단체이며, 한국여성운동의 산실이라는 점에서 임영신박사와 현덕신선생과의 인연은 그녀의 인생을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한 개인의 전기적 생애사를 통해 그 시대의 역사적 배경과 사실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가 될 수 있듯이 박원임교수의 학력과 경력에서도 일제 치하에서 교육구국의 신념과 교육의 시작은 유치원교육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임영신박사, 현덕신선생과의 인연이 그녀의 인생에 있어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고, 이는 그 당시 사회적 사실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표 3>은 학술활동에 대한 내용으로 그녀의 정년기념논문집의 내용을 요약하였으며, 박원임교수와의 논의를 통해 고려대학교 사대논집과 논총 그리고 국제학술대회발표 중 제목은 개인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으나 근거를 제시할 수 없는 내용에 대해서는 기술하지 않기로 해 생략하였다. 기본적으로 학문초기에 중요하게 여겨지는 여가·레크리에이션의 개념정립, 정책에 대한 관심과 청소년, 가족, 여성, 여가교육그리고 현재의 주된 관심사인 노인의 여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폭넓은 연구를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Ⅳ. 구술생애사(Oral life history)적 사실과 사회적 배경
1. 성장에서 여가레크리에이션을 전공하기까지
박원임교수는 식민지시절 일본에서 출생하고, 초등학교3학년 때 해방과 함께 귀국한 후, 교육제도 개편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중,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전남여자고등학교 학창시설 학교대표농구선수생활(5번), 합창반, 무용반 등 다양한 활동을 경험하고 전남지역에서 여성개화와 사회진출의 계기가 되었던 신생보육학교의 유치원교사과정, 그 후 전남여자고등학교 교사로서의 7년 경력 그리고 대학졸업 후의 일본연구생 2년, 마지막으로 고려대학교에서의 25년 동안의 교직생활까지를 회고하며 여성으로서 남성 못지않게 한 순간도 쉼 없이 활발한 활동을 했음에 자부심을 표현하였다. 1960, 70년대 당시의 사회상에 빗대어 혹시 교육의 기회나 사회진출에 있어 성차별로 인한 어려움에 관한 질문에 오히려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는 그저 열심을 다했고, 왕성한 활동을 한 것 자체에 담담히 답하였다.
Mills(1959,2000: 강희경 이해찬, 2004, 옮김, p.19)는 ‘사회학적 상상력’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역사와 개인의 일생 그리고 사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 양자 간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개인의 일생과 역사, 그리고 그 둘의 사회 안에서의 교차 문제를 파악하는 것이 사회연구의 끝이라고 기술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개인의 생애를 통해 양자간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이해보려 한다.
일본에서 태어났어. 그럼 일본에서 태어났지. 오사카. 오사카에서 태어났어. 하도 조센진이라고 괄시를 해싸니까 아버지가 아예 한국사람 없는 시골로 가서 살자고 해서 가고시마에서 또 배를 타고 가는데 아마 거의 일본에서도 제일 아래일거야. 남쪽. 가노야, 가노야라는덴데. 거긴 애들이 신발을 안 신어. 너무 더워가지고 바지도 잘 안 입고. 신발은 없어. 다 맨발이야. 근데 거기서도 우리가 조센진인 걸 알아가지고 애들이 맨날 조센삐~ 조센삐~라고 놀리면 내가 막 쫓아가서 꿀밤을 주고 그랬지..(웃음). 내가 생각해도 날카로웠지. 날 건릴면 가만 안놔뒀어. 그 동네에 한국사람은 우리 밖에 없었는데. 암튼 날 놀리면 난 가만 안 뒀어. 근데 일본에서도 선생님들이 날 그렇게 예뻐했어. 내가 노래도 잘 하고, 운동도 잘하고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사진 찍으면 내가 맨날 가운데 아니면 선생님이 나를 이렇게 무릎위에 앉고 찍고 그랬다니까. 내가 지금도 노래를 기억한다니까
...(당시 불렀던 일본동요를 불러보임)...이거봐..아직도 기억하고 있잖아.
내가, 내가 위로 오빠 셋에 내가 막내니까 다 집안에서 날 예뻐했지. 사실 오빠하고 언니가 하나 더 있었데. 근데 낳자마자 죽었데. 내가 집안에선 젤 이쁨받았지. 지금도 여수 오빠는 우리 원임이 우리 원임이 그러시잖아.
...(중략)... 일본에서는 조센진이라고 놀림받고, 해방하고 한국에 오니까 한국말 못한다고 놀림받고. 아주 서러웠지. 많이 놀렸어. 애들이. 그래서 진짜 뭐든 열심히 했지. 지는 거 싫으니까. 오빠 셋에 내가 막내여서 그런지 난 부족한 게 별로 없었던 것 같애. 그리고 뭔지 몰라도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것 같애. 여자라서 못한다? 그런 건 별로 생각해보지 못한 것 같애. 집에서도 여자니까 안 돼, 뭐 그런 건 없었으니까. 난 다 내 맘대로 했어. 밥 먹을 때도 생선 없으면 안 먹었으니까. 어느 날은 생선이 없어서 밥 안 먹는다고 했더니 어머니께서 너 밥 안 먹으면 죽어하시는 거야. 그래서 내가 나 죽어도 좋아. 그랬더니 생선을 구워 주시더라구. (웃음). 참 내가 생각해도 깍쨍이지 깍쨍이...(중략)...
근데 벌써 내 나이 이제 84아닌가. 이제는 뭐 혼자 있으니까. 아 이래서 사람은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뤄야 하나보나 하는 생각이 들지. (웃음)
일본에서 태어난 것이 그녀의 삶에 있어서 장애물이자 그녀를 더 강하게 만든 연단의 과정이라 언급한다. 인간이 출생지를 선택하여 태어나는 것이 아니듯 그녀가 일본에서 태어난 것은 그녀의 선택이 아니라 오히려 시대적 아픔과 희생양임에도 그 책임은 모두 개인의 몫이었다. 일본에서 성장하며 느낀 민족적 한은 가족들로 하여금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교육만이 삶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임을 일깨워 고등교육을 받은 오빠(교육자, 의사)들과 함께 성차별없이 교육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역사적 필연이 되었다. 한국으로의 귀국 후 부모님의 고향인 전남에서 정착하게 된 것도 그녀의 사회진출과 사회활동참여의 측면에서 앞서 언급한 현덕신선생과 임영신박사와의 연을 맺는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레크리에이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김오중교수님이 계셨기 때문이지. 광주에 있을 때부터, 중학생인가 고등학생때 부턴가 알았던 것 같은데. 글쎄 처음에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중략)...김오중교수님이 레크리에이션에 대해 많이 알려주셨지. 그리고 박교수가 이걸 공부하면 참 좋겠는데 좋겠는데 하셨지. 난 그땐 레크리에이션이 뭔지도 몰랐으니까. 그래서 일본에 가서 레크리에이션 공부 한거잖아. 거기서 레크리에이션 강의하는 교수님 옆에 착 달라붙어서 따라다녔지. 처음엔 왠 한국 사람이 와서 레크리에이션 공부한다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지 그것도 여자가. 그래서 죽어라고 했지. 맨 앞에 앉아서 한마디도 안 놓칠려구, (웃음)
...(중략)...한국에서는 레크리에이션을 공부할 곳이 없었는데 대학 졸업할 때 큰오빠가 일본으로 장학사 파견을 나가게 되셨는데 거기에 원래 가족은 못 가는데 식모를 한명 데려간다고 그래가지고 내가 식모로 가게 된 거야. 아니면 못 같지. 그래서 그때 경도대학에 혼자 찾아 간 거야. 떠듬떠듬 일본말로 내가 시험 볼 실력은 안 되니 연구생으로라도 좀 수업을 듣게 해 달라고 몇 번 찾아갔지. 그랬더니 나중에는 나 혼자 결정할 게 아니라 교수회의를 거쳐야 된다고 그러는 거야. 그러더니 일반학생들과 똑같이 수업 듣고, 과제하고, 발표하고, 암튼 다 똑같이 한다는 조건이면 가능하다고 해서 고맙습니다. 아리가또 고자이마스했지. 진짜 결석은 무슨 지각 한번 안하고 열심히 했더니 나중엔 인정을 해 주더라구. 그렇게 그렇게 끝나갈 쯤에 김오중교수님이 강사모집하고 있으니까 원서 넣어보라고 해서 고려대학교 시간강사 시작했짢아.
그땐 나 모르면 고대생 아니였지. 저기 이공대 학생들도 본교까지 와가지고 다 교양체육수업 듣고, 매스게임같은거 하고, 단체무용하고 그랬으니까...(중략)...
한국부인회 총무부터 부회장했지, 그리고 몇 대야! 5댄가 한국부인회 총본부 회장도 했지. 한국 트렘포빅스협회 만들어서 교육하고 일본하고 교류회도 하고 했지, 아~~ 거 뭐냐..고려대학교에서도 사대 교수협의회 의장직하고 뭐 뭐~~거 그냥 바쁘게 살았네.
말도마소 말도 마. 심했지. 에휴~ 말도마소.
내가 쫌 공부 좀 하려고 하면 “무~슨 여자가. 또 하면 얼마나 한다고”. 주변에 다 남자들 뿐 이었으니까. 그래도 일본에서 연구생으로 있을 때는 진짜 열심히 했지. 한시도 허투루 안 썼으니까. 일본어가 부족하니까 맨날 공부하고, 숙제하고 단 한 번도 지각, 결석 이런 거 한번 안했으니까. 그래서 인정받았지. 한국에서 차별? 처음에? 말도 마소 말도 마. 심했지 심했어
박원임교수에게 있어 레크리에이션은 너무도 낯선 학문이었으나 그녀의 성장배경과 과정을 알고 있던 김오중박사의 도움과 소개로 일본에서 레크리에이션을 수학할 수 있던 것은 그녀가 한국의 최초 여성레크리에이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라 할 수 있다. 여성레크리에이션 지도자로써 삶에 있어 그녀는 두 가지의 상반된 표현을 한다. “하고 싶은 것은 것 원 없이 다했다”라는 긍정적 관점과 “말도 마소 말도 마”라는 짧은 말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그리고 몇 번의 후속질문에도 더 이상 말을 잇지 않는 분위기에서 여성으로서 견뎌내야 했을 보수적 학교사회와 한국의 조직사회문화를 추측할 수 있다.
2. 한국여가레크리에이션학회와 협회
일본의 경우 해마다 ‘전일본 레크리에이션대회’를 개최하여 레크리에이션협회에서는 새로운 레크리에이션발표회 및 경연대회를 실시하고, 레크리에이션학회에서는 별도의 장소에서 학문적 접근을 시도하면서 서로의 상생과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이론적 접근과 실생활에서의 실천적 접근이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은 해마다 ‘전일본 레크리에이션대회’라고 해서 전국적인 행사를 갖잖아. 그럼 한쪽에서는 세미나나 학술대회를 진행하고, 다른 한쪽에서 체육관하고 운동장에서 전통무용이나 전통놀이 경진대회 같은 거 하고, 다른 데서는 새로 창작한 레크리에이션 발표회 같은 거 해서 해마다 새로운 거 뽑아서 시상도 하고, 좋은 거는 전국적으로 확대도 하고 그러잖아. 그러니까 각자 관심있는 분야에 가서 듣고, 배우고 하니까 도움이 많이 되지.
우리나라의 경우 한국여가레크리에이션의 산실로 1960년 창립된 (사)한국여가레크리에이션협회와 학술지향적인 1984년에 창립된 한국여가레크리에이션학회가 상호 교류 없이 별개의 단체로 운영되고 있는 실정이다.
합치려고 했었지. 근데 가고자 하는 길이 달랐던 것 같애. 김오중교수님하고 나하고는 생각이 같앴어.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함께 레크리에이션 발전에 대해 고민한 것은 맞는데 그 주변사람들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것 같애. 주변에 사람이 많았거든. 기존에 협회에 있던 사람들은 별로 안좋아했지. 합칠려면 협회 밑으로 들어와야 된다 뭐해라. 다들 생각하는 방향이 있겠지만 방향이 너무 다르니까 안되지.
3. 박원임교수의 삶과 여가레크리에이션
체육학은 실천학문이잖아. 이론만 있거나 어떤 행동만 있으면 체육이 아니지. 거기에는 이론과 실천이 항상 같이 있어야 되는 거야. 레크리에이션도 그래. 옛날에도 보면 레크리에이션 하면 그냥 띵까띵까하고 노세노세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거야. 학회나 세미나 가서도 요렇게 뭔 소리하나 들어보면 그런 보여지는 것만 얘기 허다라구.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거지. 레크리에이션을 했을 때에는 뭔가 변화가 있어야 되는거야. 가슴이 뭉클하거나 생각에 변화가 생기거나 행복한 감정이 느껴지거나 하는 거. 레크리에이션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거야. 행동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래서 행동만 있으면 안 되는 거야. 내가 지금은 학자나 옛날에 수업할 때 그런 건 뭐라 했는지 다 까먹었어..미안합니다. 요즘엔 친구들 이름도 까먹어....(중략)...
일본에서 꽃꽂이 자격증도 땄는데 그때 꽃꽂이 교수가 그러더라고. “남들은 그저 꽃꽂이 배우는 것에만 신경을 쓰는데 박상은 늘 그 꽃꽂이에 어떤 의미를 담으려고 한다”고. 그런 사람이 없었다고 말야. 그랬던 거 같애. 꽃꽂이를 하면서도 누군가를 생각하고, 제목은 뭐라고 할게, 어떤 분위기를 낼려구 하구. 그리고 그걸 할 때 내 느낌이 어떤가 생각하구. 나중에 생각하니 그게 레크리에이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
이론적으로 알아야 하고, 그걸 실천해야하고 그렇지 행동하는 거지, 그리고 그 다음에 뭔가 좋은 쪽으로 변화가 있어야 하는 거지. 젤 중요한 게 뭐야? 인성이야 인성. 우리는 레크리에이션을 통해 인성을 길러서 서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도록 서로 이해하고 도와야 하는 거야. 나 혼자만 기쁘고 나 혼자만 행복하면 되냐? 같이 행복하고 같이 기쁘고 그래야지. 근데 그게 말은 쉽지만 안 그래. 그렇지 않아? 근데 학교에서는 맨날 공부공부공부, 몇 등이야. 맨날 이런 거만 애기하잖아.
아는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배우지 않은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재차 강조하였다. 무엇보다 레크리에이션은 인간 삶의 변화와 가슴 뭉클한 감동이 있어야 하고 자신이 만든 결과물에 생명을 불어 넣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작은 나부터 해야지. 일단 남 뭐라 할 거없어. 나부터도 못하는데 남 얘기 뭐 하러 해...(중략)...내가 생활에서 실천하는 거는 일단 내 건강을 위해 소식하는 거, 항상 밥 반공기만 먹는 거 알잖아. 그리고 아침마다 국민보건체조 두 번씩. 세상 무슨 일이 있어도 일어나자마자 두 번하지, 천천히 그럼 거의 30분이야. 새벽5시 반쯤이면 눈이 떠져. 그러면 이불속에서 꼼지락 꼼지락 움직이면서 천천히 일어나. 그다음에 체조 하는 거야. 두 번. 그리고 씻고, 아침에는 보통 뉴스 보면서 국수 먹고, 청소하지. 그리고 알다시피 아직도 잘 걸어 다니잖아. 늘 지하철이나 버스타고 걸어 다닐 때 다리 높이 들어서 걷고. 건강을 위해서는 그런 거지 뭐.
70세 후반까지만 해도 골프 18홀을 큰 어려움 없이 마쳤고, 84세의 나이에도 대중교통을 이용해 학교를 오고 간다. 그녀는 크기에 상관없이 본인 물건은 본인이 들어야 하고, 본인의 일은 직접 하는 것을 철저한 원칙으로 여긴다. 가방하나라도 누가 예의상 들라하면 정중히 거절하면서 자기일은 스스로 해야한다하고, 차 한 잔을 마셔도 자신이 마신 그릇은 본인이 치워야 한다. 또한 생 활 속에서 할 수 있는 가벼운 신체활동과 식습관의 조절은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집에 그 쇼핑백뭉치가 얼마나 있는지 알아? 수백 개는 있을 거야. 제자들이 선물주거나 어디서 선물 들어오면 포장지도 칼로 깨끗하게 뜯고, 비닐은 잘 접어서 모아두지. 버리는 건 언제든 할 수 있어. 그런데 모아두면 언제가 한번은 쓰거든. 메모장도 달력 있잖아 달력, 잘 오려서 집게로 콕 집어서 쓰면 또 쓸수 있잖아. 그리고 뭐 있으면 꼭 수위아저씨 수대로 조금씩 나눠서 갖다드리고. 뜨개질 한 거, 십자수한 거, 재활용품 이용해서 핸드 크래프트 한 거 그런 거 다 나눠 주잖아. 근데 사람들이 안 믿어. 이거 진짜 박선생이 한 거야? 그러지.(삐쭉). 그래서 십자수에는 내 싸인 했잖아. (웃음). 옛날엔 꽃꽂이도 많이 하고. 그리고 과일 살 때는 가끔 집 앞 큰 사거리에 트럭아저씨가 와. 가능하면 트럭아저씨나 길거리에서 과일 파는 할머니들한테 사지. 작은 것부터 실천하고 나부터 나누면서 사는 거지. 일단 나부터 잘 하는 게 우선이야.
스스로 해야 할 것과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과는 철저하게 구분해야하며, 검소함과 성실함이 그녀 삶의 기본자세라 한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는 중에 레크리에이션에 대한 이야기는 학문적 접근이라는 딱딱한 틀을 깨고 어느 덧 그녀의 삶에서 하나하나 생명력을 갖고 움직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요즘엔 너무 막 벼려. 우리집 아파트에 분리수거할 때 보면 산이야 산. 잘 보면 다 쓸 수 있는 건데 왜 버리지 싶어. 난 너무 못 버려서 문제구. 버려야지 버려야지 하는데 꼭 놔두면 쓸 때가 있단 말야. 그래서 못버려. (웃음)
근데 요즘엔 다들 너무 쉽게 버려. 사고 버리고 또 사고 그러나? 돈 벌어서 사서 쓰고 또 사서 쓰고 그러나봐. 자기 돈 쓰는 거 뭐라 그러겠어. 그런데 그런 게 다 교육인거야. 여가시간만 있으면 뭐해. 그 시간에 뭘해야 좋은지 알아야지. 열심히 일해서 돈 벌었는데 그걸 어떻게 어디다 써야 하는지 그게 가정교육이지. 그리고 여가교육은 그렇게 가정에서부터가 시작이야. 주변도 살펴보고 나만 생각하지 말고 그래야 우리 모두 행복하지...(중략)...
난 결혼에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 그 뒤론 딱 결심했지. 혼자살기로. 잘못된 선택을 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혼자서 좋은 사람들 만나 잘 지내왔지, 근데 이렇게 나이를 먹고 집에 혼자 있으니까 아 이래서 가족이 필요한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어. 지지고 볶구 싸워도 남편도 있고, 자식도 있고, 손주새끼들도 있고 그렇게 사는 게 인생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 가족끼리 같이 여행도 가고, 식사도 하고, 놀이도 하고 그런 평범한 것에서 오는 행복이 크잖아. 행복은 작은 것, 사소한 것 그리고 항상 좋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나름인 거 같애. 늘 감사하며 살려고 하지. 지금도 얼마나 감사해. 감사하지.
늘 궁금하였지만 극히 개인적이고 민감한 주제인 결혼관에 대해서는 어렵게 이야기를 꺼내 저장매체에 저장하였으나 지극히 사적인 일이라 간단히 언급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가교육의 시작은 가정교육에서부터라고 강하게 주장하며 가정교육과 가족여가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Ⅴ. 논의
세계2차 대전 중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준비 없이 맞이하게 된 우리의 해방은 역사에서 많은 사회적 혼란의 시작을 의미하였다.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뿐 아니라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전흥남(2005)은 황순원의 해방직후 소설들을 중심으로 그 당시의 사회상(전재민의 삶의 애환, 농민항쟁을 통한 사회구조변화, 술을 매개로 한 신분상승의 욕구 등)을, 최병우(2011)는 해방직후 만주지역 조선인들의 귀환과 정주의 선택(경제적인 문제, 해당 거주지역의 치안문제, 해당 거주기간으로 인한 고국과의 거리감)의 원인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은 해방직후의 사회상을 소설을 통해 어떻게 다루고 있는 가에만 머물지 않고, 그러한 사회상이 보여주는 역사적 배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오천석(1964: 김동춘, 2015에서 재인용, p.228)의 경우에는 8.15 직후 학부모들이 일정의 구속 밑에서 억제되었던 “교육에 대한 열정이 둑을 넘어 격류가 되어 흐르는 것 같았다”고 표현하며 구시대에 살았던 부모들의 교육에 대한 한을 자식들을 통해 실현시키려는 분위기를 언급하고 있다. 이 역시 ‘대한민국은 학구열, 교육열이 강하다’라는 현상인식만이 아닌 그 현상을 만들어 낸 배경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박원임교수의 경우에도 해방시기부터 한국에서 초등학교부터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가기까지 금전적인 어려움으로 고생한 것 외에 여성이기 때문에 차별받고 금기시되던 분위기는 없었다고 진술하고 있으나 한국사회의 조직문화에서 겪어야했던 성차별적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을 꺼려하였다. 또한 그동안 한국에서 사용하였던 이력서의 내용과 실제출생 기록이 달랐고 그렇게 살아와야 했던 것이 그 당시부터 8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우리 역사가 안고 가야할 민족의 상처인 것이다. 가족이 왜 일본으로 이주했는가에 대한 질문보다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본에서 출생하여 겪었던 서러움과 광복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고국이라는 기쁨보다는 동족에게 느끼는 따가운 시선과 이질감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했던 그녀의 삶에 대한 배경이 그녀의 삶을 이해하는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녀가 꾸준히 공부를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오빠들도 교육을 통한 구국의 일환으로 교육에 전념한 결과 교육자와 의사의 길을 갈 수 있었고, 박원임교수가 학업을 이어가는 부분에도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가족의 지지가 있었다는 것이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된 동기도 큰오빠의 파견도 있지만 유년시절 일본에서 보낸 경험으로 언어장벽의 턱을 낮출 수 있었던 것도 큰 이유가 되었다. 이것은 국내에 레크리에이션이 처음 도입되는 시기에 청송 김오중교수가 미국에서 레크리에이션을 공부한 영향으로 미국의 레크리에이션이 도입되어 발전하는 초장기 과정과 그의 뒤를 잇는 박원임교수가 일본에서 공부한 영향으로 일본의 레크리에이션이 도입되어 전파된 상황은 자연스런 결과일 수 있다.
한편 한국 여성 최초 여가레크리에이션 지도자라는 표현에 있어 여성 최초이긴 하지만 그것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이고, 물론 자신의 노력도 있지만 모든 배경 조건이 그녀가 그것을 할 수 있게끔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회고하였다. 따라서 여성이기에 더 어려웠다 거나 여성이기에 더 가치를 두어야 한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학문을 함에 있어서 여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고는 일제식민지 하의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에 있어 교육은 교육구국의 관점에서 성차별보다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의 측면에서 더 활발하게 진행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일제가 식민지하에서 교육체계를 통제하면서 사립여학교와 기독교계 여학교의 수가 현격히 감소(100인의 여성체육인, 2014: 이보나, 허현미, 2016에서 재인용)하였다는 사실과 그 이전 구한말 고종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관립여성학교를 세우려 했던 시도나 1908년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여성교육을 목적으로 한 여성단체의 설립이 지방으로 확대(김혜승, 2011)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한국 여성교육은 국가의 존망과 함께 성장해 왔다.
박원임교수는 일본에서의 경험에 대해 부정적 시각도 있지만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는 성찰적 시각에 더 집중한다. 약속에 철저하고, 성실하고, 꼼꼼하고, 갚을 줄 알고, 자신의 일에 책임지며, 검소한 생활습관 등을 열거하며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게 한다. 또한 여가레크리에이션의 관점에서도 현실상황에 적합한 놀이문화의 지속적인 창작과 전통놀이문화에 대한 계승·발전적 자세 그리고 함께 어울리며 협동의식을 고취하는 마을공동체 축제문화 등을 언급하며 한국여가레크리에이션 발전에 대한 걱정도 피력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론과 실천 그리고 그 실천에 대한 평가와 실질적 피드백이 선순환 되어야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데 한국여가레크리에이션협회와 한국여가레크리에이션학회의 교류단절로 시너지효과를 내지 못하는 현실은 우리 세대가 극복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가레크리에이션의 균형적 발전을 위해서는 이론적 접근과 실천적 측면의 조화로운 상호 협치를 강조한다. 이론을 알고 그것을 실생활에 적용하여 실천하고 그 실천이 바탕이 되어 한사람의 삶이 긍정적이고 행복하게 바뀌도록 하는 것이 레크리에이션이라고 거듭거듭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의 기본은 개인에서부터 시작한다. 다른 사람을 평가하기 전에 자신의 옷매무새를 살펴봐야 함을 언급하며 자기 자신하나 관리 못하는 사람은 타인의 잘잘못을 논할 처지가 못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박원임교수가 강조하는 레크리에이션은 각개인이 이론과 실천을 통한 삶의 긍정적 변화를 함께 나누며 모두가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긍정적인 에너지의 표출이 여가·레크리에이션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Ⅵ. 결론 및 제언
본 연구는 객관적 기록과 개인의 구술생애사를 중심으로 박원임교수 한 개인의 생애와 그녀를 둘러싼 그 시대의 사회상을 탐구하고, 여가레크리에이션분야에서 최초의 여성지도자의 삶을 살아온 박원임교수의 삶을 통해 여가레크리에이션의 가치와 의미를 재조명해 보고자 하였다.
박원임교수는 일본에서 출생하여 해방 직후전라도 광주로 귀환한 후 중앙대학교를 거쳐 일본에서 여가레크리에이션을 수학하고 청송 김오중교수의 뒤를 잇는 한국최초의 여성 레크리에이션교육자이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최초’, ‘여성’이라는 단어에 개의치 않고 혼란스러운 시기에 남여의 구분 없이 모두 열심히 살기위해 노력했고 가족들의 적극적인 지지가 원동력이었음을 회상한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의 역사에서 여성의 교육활동은 개화기로 거슬러 올라가 교육구국이라는 기치아래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 성별의 문제가 아닌 국가존망의 위기에서 더욱 활발히 진행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런 암울한 시기를 지나 국가재건의 어려움 속에서 국민에게 삶의 희망과 즐거움을 선사하고자 도입되었던 학문이 여가·레크리에이션이라는 것을 다시금 환기해야 한다. 개인의 삶과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도 여가·레크리에이션의 이론과 행동적 실천 그리고 그를 통한 긍정적 변화가 여가·레크리에이션의 가치이자 의미라면 발전적 방향을 제시할 의무가 있는 한국여가레크리에이션학회와 한국여가레크리이션협회가 함께 상생의 길을 모색해야 할 책임에 대해 고민해야 할 시기라 생각된다.
연구를 진행하며 기록중심 구술생애사의 방법을 통한 개인의 삶과 시대적 사회상과의 관련성이 주는 의미에 대한 가치는 생각보다 더 큰 문제의식을 갖게 한다. 현재 ‘여가·레크리에이션’이라는 용어에서 ‘레크리에이션’의 개념은 거의 사어(死語) 또는 의미의 변질이라는 흐름 속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정 학문의 흥망성쇠도 시대적 요구에 의해 부응하는 것이겠지만 그 과정에는 이름 모를 많은 선각자가 있음을 상기하면서 다양한 인물사적 탐구와 그 시대적 사회상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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